내가 한주에서 해고된 이유

-내가 <시사인투데이>를 창간한 이유-

박태환 승인 2021.03.14 16:13 | 최종 수정 2021.03.15 12:05 의견 1

백골부대 수색대를 전역한 후 첫 직장이 ㈜한주였다. 묵묵하게 맡은 일만 하다가 회사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었다. 고원준 사장이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여직원들을 강제로 야근을 시키는 것이다. 유권자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인쇄물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내 옆자리의 어린 여직원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근무시간에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회사가 고 사장의 개인소유여도 문제를 삼을만 했다. 당시 한주는 엄연히 공기업이었다. 고 사장은 회사 돈으로 컴퓨터를 장만해서 회사 돈으로 야근수당을 주며 사적인 일을 시키는 셈이다. 당시 나는 노조대의원이었다. 전두환 정부시절의 있으나마나한 어용노조라 우리 부서에서 맡을 사람이 없어 막내인 내가 형식적으로 가지게 된 직책이었다.

나는 노조 대의원 회의에서 그 부당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어린 녀석이 감히 고원준 사장에게 대들다니!” 회사 직원들이 나란 존재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노조 대의원으로서 회사 사장의 부당 행위에 적법하게 제동을 건다는 등의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는 옆자리의 여직원이 불쌍해서 떠들었을 뿐이다.

회사는 더 이상 여직원들에게 야근을 시키지 않았다. 고 사장의 지시였는지, 아니면 선거 홍보 작업을 다 마쳐서 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건 이 일로 나는 사내에서 제법 올곧은 놈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5공 말기가 되어 회사를 민영화 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정부가 지분을 매각해 석유화학단지 내의 회사들에게 쪼개어 판다는 것이다. 단지 내 회사들은 한주가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직원 수가 많다는 것을 지적한 모양이다. 민영화 하면서 하급 직원 수를 대폭 정리를 한다는 불길한 소문이 나돌았다.

집으로 직원들의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여직원 야근문제이후 주목을 받는 게 부담스러워 노조 대의원 직을 그만둔 후였다. 그런데도 직원들은 전화를 걸어와 “어린 딸이 셋이나 있어 정리해고를 당하면 안된다”는 등의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그게 부담스러워 일부러 집으로 늦게 귀가하는 날도 있었다.

회사에 갔더니 인사과의 모씨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왜 왔냐고 했더니 “전에 야유회 가서 말을 심하게 해서 미안하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런 기억도 없는데, 그는 정말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듯 어린 나에게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경리계의 모씨도 찾아왔다. 그는 무슨 장부를 들고 왔는데, 고 사장의 비위에 대해 알려줄테니 잘 부탁한다고 했다. 고 사장이 직원 퇴직금으로 줄 돈을 개인적 용도로 무단 사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십 수년이 지나 드러난 일인데, 고 사장이 그 돈으로 국내외 카지노를 출입하고 있었다.

어느 날 동기들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고 사장이 오늘 저녁에 서울 본사에서 내려와 노조위원장에게 ‘싸인’을 받아가기로 했단다. 그게 뭐냐고 했더니, 노조가 회사의 정리 해고에 대해 동의를 하는 절차란다. 동기들은 직원들이 퇴근도 하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일단 알았다고 하고는 혼자 있고 싶다고 말했다. 동기들은 밖으로 나가서 담배를 태우며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노조위원장도 아니고, 대의원도 아니고, 일개 직원에 불과하다. 도저히 내가 나설 일이 아닌데, 직원들은 나를 압박하고 있다. 나는 한동안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홀로 앉아있었다.

동기 중 하나가 급하게 사무실로 들어왔다. 고 사장이 회사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나는 “정문을 막으라”고 했다. 그 녀석은 씩 웃으며 “알았다”고 하고는 뛰쳐나갔다. 한주는 예나 지금이나 국기기간사업장이라 정문을 봉쇄하면 안된다. 직원 중 누구라도 보튼 하나만 누르면 전 석유화학단지가 마비가 될 수 있다.

밖으로 나가니 직원들이 정문을 막아놓고 질서정연하게 죽치고 앉아있었다. 어둠이 깔린 정문 바깥으로는 시위진압 차량들이 멀찌감치 보이고, 경찰간부 몇몇이 무전기를 쥐고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철이 없어서인지, 아직 당해보지 않아서인지, 그게 별로 무섭지 않았고 마치 시위주동자라도 되는 것마냥 직원들 앞에 섰다.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제가 해고되지 않으면 여러분 중에 누구도 해고되지 않을 겁니다”. 직원들이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쳐주던 기억이 난다. 그때 노조사무장이 본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태환아, 고 사장이 니 좀 보자칸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그냥 사장님한테 정리 해고는 안된다고 하이소” 자형 친구이기도 한 노조사무장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니 정말 그럴래? 와 니가 나서노?”

노조사무장이 돌아가고, 잠시 후 고 사장이 몽둥이를 움켜쥔 채 모습을 드러냈다. 고 사장은 몽둥이를 마구 휘두르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어떤 OO가 너거 해고시킨다 카더노?!” 직원들이 몽둥이를 피하며 멈칫멈칫하자, “이놈 OO들아! 이 안으로 다 기어들어온나. 들어와서 이바구 하자!”

나의 눈치를 보던 직원들은 한 둘씩 고 사장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정문 앞에는 나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스산한 밤공기가 온몸을 휘감으며 몸이 공중에 붕 떠있는 것 같았다. 건물 안에서 고 사장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단 한 명도 안 내보낼게! 특별 보너스도 100 푸로씩 다 줄게! 단, 저 OO하고 눈이라도 마주치는 놈은 나한테 죽는다!”

이게 내가 평범한 삶을 영위하지 못하고 언론에 몸담게 된 이유가 된다. 지역기자로 근무하면서도 다방아가씨한테까지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곤 했다. 어떨 땐 ‘이게 팔자인가보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울산검찰 특수부에서 나를 체포할 때도 억울한 일이 있으니 도와달라고 연락을 했었다. 아마 제보를 한 놈이 “억울한 일이 있으니 도와달라”고 전화를 하면 바로 나온다고 귀띔을 한 모양이다.

세상이 뭐라건 옳은 사람은 옳다고 말하고, 상대가 누구건 나쁜 사람은 나쁘다고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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