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7시 30분에 걸려온 검사님의 전화

박태환 승인 2023.10.02 16:10 | 최종 수정 2023.10.03 21:40 의견 0

새벽에 지인을 태화강역까지 바래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여천천 다리에서 우회전을 하려고 좌측 야음동 방향을 보니 멀리서 엠블런스가 앵앵 다가오고 있었다. 거리가 꽤 멀어 보여 우회전을 한 후 달동주공 방향으로 가기 위해 좌측 깜박이를 넣었다.

건데 갑자기 엠블런스가 옆으로 바짝 다가오더니 "야 이 XXX야!" 고함을 질러대는 게 아닌가. 어이가 없어서 조수석 창문을 열고 쳐다보니 조폭처럼 깍두기 머리를 한 건장한 체구의 운전자(이하 깍두기)가 고함을 질러대며 또 욕설을 퍼부었다. 깍두기는 앞서 달려나가며 비웃듯 창밖으로 손가락 욕설을 하기까지 했다.

잔뜩 열 받은 나는 엠블런스를 쫓아가 "야이 XXX야! 너 아까 뭐라 그랬어?!"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깍두기는 핸들을 확 꺽어 내 차 앞을 가로막더니 차에서 내려 성큼성큼 다가왔다. 깍두기가 차 뒷문을 여니 겁에 질린 환자와 보호자의 모습이 보였다. "응급환자 타고 있는 것 봤지? 넌 인제 죽었어!"

깍두기는 내 차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는 112에 신고를 했다. "저기 구급차 기산데요. 어떤 또라이가 환자 이송을 못하도록 차로 가로막고 있어요. 급해요. 빨리 와주세요!" 깍두기는 이 말을 마치자 말자 전화를 끊고는 다시 112에 전화를 걸어 같은 말을 반복했다. 다급한 흉내를 내며 한 서너 차례는 계속한 것 같다.

이내 파출소 순찰차가 달려왔다. 깍두기는 출동 경찰관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나를 '엄벌에 처해달라'고 한 후 자리를 떴다. 나는 경찰관들에 의해 파출소로 연행이 되었다. 건데 내 차 블랙박스를 검색하던 경찰관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엠블런스를 가로막은 게 아니라 깍두기가 내 차를 가로막은 후 112에 신고를 한 것이다. 경찰관들은 깍두기를 호출하고 나 보고는 가도 좋다고 했다.

잊고 있었는데, 얼마 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검찰 수사관이라며 딱딱한 목소리로 그날의 상황을 형식적으로 묻고는 이내 전화를 끊었다. 요새는 인권 보호 차원에서 사소한 사건은 가해자만 소환 조사할 뿐 피해자는 유선 조사만 하는 경우가 많다. '사건이 검찰로 넘어갔구나'라고만 생각했다.

또 얼마 후 저녁 무렵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늦은 시간에 누구지' 하며 시계를 본 기억이 나는데, 오후 7시 30분경이었던 것 같다. 차분하고 공손한 목소리로 "울산지청 000실 000 검사입니다"라고 말씀하는 게 아닌가. 나는 의아해하면서 "아예 검사님"이라고 말했다. 순간적으로 '요새 별다른 글도 쓰지 않고 조용히 사는 데 뭐지'하는 생각을 했다. 검사님은 그날의 상황에 대해 몇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 전화를 했다고 말씀을 했다.

내심 많이 놀랐다. 퇴근할 때가 휠씬 지난 시간인데 그 사소한 사건에 대해 검사님이 직접 전화를 걸다니. 나는 진심으로 공손한 어투로 그날 상황을 설명해 드렸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엠블런스를 가로막은 건 사실이네요?" "예 검사님,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엠블런스가 50미터 이상 떨어져 달려오고 있었고, 당시 새벽이라 8차선 도로에는 제 차밖에 없었습니다."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었다?" "예." "환자는 타고 있었나요?" "예, 제가 봤습니다."

그날 이후 깍두기가 전화를 걸어왔다. ”죄송하다. 미안하다. 없었던 일로 해달라.“ 난 아무런 대꾸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구급차 운전자로서 긴급 호송 의무를 다하지 않은 채 그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려고 했기 때문에 죄값이 만만치 않으리라.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후 야당이나 일부 언론에서 '검찰 독재'라는 표현을 예사로 사용한다. 검찰이 전 정부 인사에 대한 수사나 야당 인사에 대한 수사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김건희 씨 관련 수사나 친정부적인 인사에 대한 수사는 기피하는 편파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검찰 독재'라는 표현은 자중하자. 권력에 빌붙어 '정치 수사'를 하는 검사는 극소수이고, 대다수 검사들은 밤이 늦도록 본분에 충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 독재'라는 표현보다 '윤석열 사단 독재'라는 표현이 합당하다. 이재명 대표 영장 기각사건에서 보듯 '윤석열 사단'은 언젠간 대가를 치루어야 할 정도로 검찰권을 남용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때 서울중앙지검장을 지낸 이성윤 검사가 있다.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근무를 하다 법무연수원으로 좌천된 이 검사는 "윤석열 사단은 전두환의 하나회에 비견될 정도로 무도하다"고 비판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사법연수원 23기 동기인 그는 현직 검사 신분인데도 윤 대통령을 '대통령'이라 칭하지 않고 '전 총장'이라 부른다. 사법연수원 29기인 한동훈 검사가 검찰을 지휘하는 법무부장관으로 취임을 했는 데도 수모를 무릅쓰고 검찰에서 떠나지 않고 버티고 있다. '윤석열 사단'을 자기 손으로 척결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이성윤(23기)과 함께 신성식(27기) 이정현(27기) 고경순(28기) 정진웅(29기) 박은정(29기) 임은정(30기) 진혜원(34기) 등의 이름을 기억하자. 윤석열 정부의 한동훈 법무부장관 체제 하에서 온갖 수모를 견디며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검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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