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버스 안에서 본 원피스 그녀

박태환 승인 2023.04.22 09:29 | 최종 수정 2023.07.29 07:21 의견 0

시골버스 안에서 본 원피스 그녀

밤늦은 시각 시골버스 안에는 그녀와 나밖에 없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긴 생머리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창밖으로 24시 마트가 보이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버스에서 내리니 그녀도 뒤따라 내렸다. 텅 빈 버스는 손살같이 달려가 좌회전을 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 시골 읍내는 인적 하나 없이 정적만 감돌았다. 버스에서 내린 그녀는 내가 가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도로를 가로질러 걷던 나는 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기 위해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때 버스 안의 그녀가 내 옆을 지나쳤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분명히 버스에서 내려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던 그녀였다. ‘순간 이동도 아니고 이게 뭐지..’ 나는 그 자리에 멈칫 선 채 앞서 걷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비슷한 옷차림의 다른 아가씨였나..’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그녀가 맞았다. 그 순간, 자세히 보니 버스정류장에서 10Μ쯤 떨어진 도로 표면에 희미하게 횡단보도 표시가 보였다. ‘아!...’

그녀와 나는 목적지가 같은 방향이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도로를 가로질러 걸어왔고 그녀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 횡단보도를 건너서 돌아왔던 것이다. 차량 통행이 빈번한 대낮이거나 복잡한 도심이라면 놀랄 일도 아니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인적 하나 없는 시골 읍내의 좁은 도로였다. 저만치 또박또박 걸어가던 그녀는 이윽고 골목길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녀가 사라진 골목길을 쳐다보며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난 어떻게 살아왔나’,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별생각이 다 드는 찰나였다.

집사람 이야기
<원래 하나만 쓰려했는데 글이 짧은 것 같아 ‘팔불출’을 감수하고 덧붙인다>

㈜한주를 그만둔 후 지방 모 대학에 편입학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집사람과 연애하던 시절이었는데, 가끔 반찬이랑 갈아입을 속옷을 챙겨오곤 했다.

그날도 터미널에서 막차를 타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유독 사람들로 붐볐다. 집사람 앞으로도 사람이 많았고 뒤로도 많았다. 버스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승차를 시작하는데, 집사람 뒤에 선 사람들이 슬금슬금 앞으로 끼어드는 것이 아닌가.

저러다 혹시 버스를 타지 못할까 봐 지켜보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난 그때 처음으로 집사람에게 화를 낸 것 같다. “이 바보야! 사람들이 새치기를 하는데, 왜 쳐다보구만 있어?!” 그래도 집사람은 요지부동이었다.

난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성격이 아니다. 남이 나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은 참지 않는다. 하지만 집사람은 이태껏 누구랑 언성을 높이며 다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 긴 세월을 살아오며 거짓말 같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재래시장에 가면 물건값도 깍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예 사질 않지, 흥정을 하려 들지 않는다. 시장 할머니에게 돈을 드릴 때도 호주머니에서 꺼낸 꾸깃한 돈이 아니라 지갑에서 꺼낸 반듯한 돈을 건넨다. 거스름으로 받은 꾸깃한 돈은 집으로 돌아와 반듯하게 펴서 지갑에 넣어둔다.

그런 집사람은 아등바등 살아온 사람들에 비해 손해 보는 삶을 살아온 걸까. 아닌 것 같다. 집사람은 내성적인 성격이라 주변에 친하게 지내는 이들이 많지 않다. 온종일 한 두 통 걸려오는 전화는 대개 친정 식구들이다. 하지만 집사람을 아는 사람들은 다들 좋아한다. 그게 부러울 때가 있다.

세상에 집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이 딱 한 사람이 있다. 시어머니가 그렇게 힘들게 해도 같이 언성 한 번 높인 적 없고 눈으로도 쳐다보는 법이 없지만, 단 한 사람은 정말 싫어한다. 바로 나다. 평생 월급 봉투 한 번 가져다준 적 없으면서 고함이나 질러대고 큰소리나 쳐대니 그럴 수밖에.

만약 집사람이 심야에 시골버스를 탔다면 어떠했을까. 아마 집사람 역시 십중팔구 길을 돌아서 횡단보도를 건넜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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