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보스>는 어떻게 망했나

박태환 승인 2023.04.25 11:56 | 최종 수정 2023.04.27 10:50 의견 1

우리나라 최고의 건달 세계에서 연락이 왔다. 영화를 찍으려고 하는데, 시나리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마 새카만 후배인 조양은이 찍은 영화<보스>를 보고 자극을 받은 것 같았다.

명동 퍼스픽호텔로 가서 신상현 씨(신상사)에게 인사를 드렸다. 노구의 신 씨는 “작가님 잘 부탁합니다”는 단 한 말씀만 했다. 황 회장(가명)이란 분과 계약을 했다. 계약금 1200만원을 받고,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1100만원을 받기로 했다. 황 회장은 건달답게 그 자리에서 100만원권 수표 12장을 주었다.

글을 잘 쓰는 후학 2명을 보내 인터뷰를 진행하라고 했다. 신상사 이하 여러 명과 인터뷰를 한 후 줄거리를 만들었다. 황 회장이 퍼스픽에 온돌방을 잡아주기에 근 한 달간 시나리오를 썼다.

매일 아침마다 호텔 커피숍에서 황 회장과 미팅을 했는데, 시나리오 양이 계속 늘어났다. 자신들의 세계에 대해 그만큼 할 말이 많았던 것이다. 참고로 대부분의 상업영화는 런닝타임이 100분이다. 그 이상이 되면 관객이 지루해한다. 따라서 오프닝, 라스트크리딧을 제외한 시나리오는 90분에 맞추어야 한다. 요새 돈으로 수 천억원이 들어간 <전쟁과 평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의 대작은 예외가 된다. 나는 참다 못해 이야기를 꺼냈다.

“상업영화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보다 관객이 보고 싶어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이런 시나리오로는 메이저 사의 투자를 받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상업영화는 시나리오가 90분 이하여야 하는데, 이미 초과하는 상태이다.”

시나리오는 A4지 1매당 2분으로 계산한다. 50매만 해도 100분이 되는데, 당시 70매 정도가 되었던 것이다. 성격이 불 같았던 황 회장이 화를 냈다. 언성을 높이진 않았으나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돈을 더 달라고 해.”
“돈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닙니다.”
“더 줄테니 하라는 대로 해.”
“아닙니다. 더 늘어나면 안됩니다.”
“하라는 대로 못하겠다?”
"예. 이제 다듬어야합니다.”
“그럼 정리해. 그때 12장 가져갔지?”
“예..”

황 회장은 그 자리에서 100만원 권 수표 11장을 주었다. 그러더니 어깨를 툭 치며, 그동안 수고했으니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그후 <내부자들> 시나리오를 썼던 작가가 이어받았는데, 황 회장을 찾아뵐 때마다 시나리오 양이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얼른 봐도 근 100매를 초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고심하다가 끝내 결정하지 못한 클라이막스가 궁금했다. 주인공이 건달로 살아온 것을 속죄하는 장면이었다.

“클라이막스는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정명이가 눈길에 십자가를 매고 산비탈을 올라가는 걸로 했어.”

황 회장은 아주 자랑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김기덕 감독의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의 클라이막스 장면이다. 모티브는 같고 산과 강 장소만 다를 뿐이다. 난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작가가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까?‘
”음. 아주 똑똑한 놈이야.“

감독은 <여고괴담>을 찍은 박모 감독이 맡았다. 천정명 이시아를 주인공으로 한 촬영이 끝났다. 당초 30억 원을 예산으로 잡았는데 15억 원을 초과해 45억 원이 들어갔다고 했다. 시나리오 양이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편집 과정에서 드디어 문제가 불거졌다. 박 감독이 90분으로 상영시간을 맞추려고 하다 보니 버려야 하는 씬이 많았던 것이다.

”박 감독, 이건 또 왜 버려?“
”상영시간을 맞추어야 합니다.“

황 회장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무려 15억원이나 더 투입해 찍은 영상을 도려내야 한다니 화가 치밀었을 것이다. 결국 황 회장과 박 감독은 결별을 했다. 이게 치명적이었다. 어느 유명 감독이 자기가 찍지도 않았는데, 돈 몇 푼 받고 이름을 빌려주려 하겠는가.

어떻게 보면, 난 아마추어이고 <내부자들> 작가나 박 감독은 프로이다. 그들은 황 회장이 시키는대로 하면서 작업이 늘어날수록 돈을 더 받았을 것이고, 나는 돈을 떠나서 거부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얼굴없는보스>는 망했다. 서울 변두리 극장 몇 곳에서 상영되다가 조기에 간판을 내려야 했다. 황 회장과 나는 자주 통화를 하곤 했었는데, 영화 간판이 내려간 후로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없는 번호'라는 멘트가 나오고 있다.

언젠가 내가 황 회장에게 "왜 영화를 찍으시려고 합니까?" 물었더니 "대박 내서 배고픈 후배들 도와주려고 한다"고 말씀했다. 그래서 난 최소한 실패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황 회장의 지시를 거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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