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은 왜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나

박태환 승인 2023.05.06 12:48 | 최종 수정 2023.05.09 09:18 의견 2
러시아 공습으로 쑥대밭된 참혹한 우크라이나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의 참전으로 독일이 패배한 것으로 안다. 일본이 항복한 것도 미국의 원자폭탄 때문으로 안다. 엄밀하게 보면 아니다. 독일이 패배한 것도 일본이 항복한 것도 소련 때문이다. 독일은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한 후 역공의 기회를 잡은 소련군이 230만 대군을 동원한 바그라티온 작전을 펼치자 베를린까지 밀려 공방전을 벌이다 항복을 했고, 일본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에도 1억 결사항전을 고집하다 160만 소련군의 만주 침공이 시작되자 항복을 했다. 만주국 관동군 70만 명 중 10만 명이 몰살을 당하고 60 만명이 소련군의 포로로 잡히자 서둘러 미국에 항복을 했던 것이다. 독일은 미국에게 항복을 했다가 소련의 요구로 다시 항복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미국이 주도한 노르망디상륙작전은 1944년 6월에 일어난 전투이다. 이때는 독일군이 1941년 10월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소련군에게 최초로 패배한 데다 1942년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마저 대패한 상태였다. 이어 독일군은 동부전선 마지막 대공세였던 1943년 7월 쿠르스크 전투에서 200만 대군과 5천 여대의 T-34를 동원한 소련군의 물량 공세에 밀려 기갑전력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폴란드 쪽으로 무질서하게 후퇴를 해야 했다. 따라서 1944년 6월의 노르망디상륙작전은 동부전선에서 사실상 소련의 승리가 확정된 뒤 미군이 유럽 전선에 뛰어든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이 자랑하는 1944년 12월 아르덴 벌지전투는 이들 전투에 비하면 어린아이 병정놀이 수준이다. 히틀러는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수 백만 소련군의 베를린 본토 공격이 임박하자, 뒤에서 깐죽대는 미군을 프랑스에서 몰아내고 소련군에 집중하기 위해 아르덴 숲 공략에 나선 것이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40만 명을 잃었으나 벌지에서는 2만 명을 잃었고, 미군 등은 그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 독일군은 선전했으나 미군의 공습으로 작전이 지연되어 탱크의 연료가 바닥나 후퇴해야 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38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소련을 침공한다. 이른바 바르바로사 작전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한 단일 군사 작전이기도 하다. 개전 초기 승승장구하던 독일군은 왜 패했을까. 역사학자들은 그 원인을 주로 ‘히틀러’에서 찾는다. 만슈타인 구데리안 같은 명장들의 의견을 무시한 히틀러의 독선과 아집이 전쟁을 망쳤다는 것이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전쟁의 흐름을 바꿀 중대한 결정을 히틀러가 단독으로 했을까. 그때마다 본부 참모진과 작전 회의 후 최종 결정을 히틀러가 내렸을 것이다. 또한 소련군에게 밀릴 당시 전쟁을 총지휘하는 입장에서 특정 지역 사수의 중대성을 알기에 불리한 전황에도 후퇴를 허락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갈수록 불리하게 전개되는 전쟁의 양상으로 보아 주변에는 직언을 하지 못하고 아첨이나 하는 참모들이 많긴 했을 듯하다. 현재의 우리나라 대통령실 같이.

나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패 원인을 단 하나의 단어로 표기하면 ‘영토’로 본다. 히틀러가 작전 개시 때 병력을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북부 중부 남부 세갈래로 나눠 침공을 한 것도 영토 때문이다. 독소전의 승패를 가른 전투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이 된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이 최초로 패배한 것도 영토 때문이다. 당시 독일군은 주로 트럭이나 우마차를 이용해 보급을 했는데, 일일 수 백만 대군이 먹을 식량이 어머어마 했을 것이다. 포탄 등 소요되는 무기도 마찬가지이다. 소련의 광활한 영토 때문에 보급선이 늘어졌고 겨울이 찾아와 동계전투에 대비하지 못한 독일군이 패배한 것이다.

독일군이 40만 명이라는 최대 규모의 사상자를 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것도 영토 때문이다. 소련 남부의 영토 안으로 너무 깊숙이 들어가버려 식량이나 포탄을 제대로 보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련군은 도시 북쪽 볼가강을 통해 무한정 병력과 무기를 공급할 수 있었다. 독일군 입장에서는 허기지고 실탄은 소진되고 있는데 달려드는 소련군은 죽여도 죽여도 끝이 보이지 않는 악몽의 전투였다.

따라서 바르바로사 작전의 패인을 요약하자면, 히틀러는 독소전도 프랑스 점령 때와 같이 단기간에 끝날 것으로 예상하고 보급 문제를 등한시 했으나, 소련의 광활한 영토 때문에 전쟁이 장기화되고 보급이 완활하지 못해 결국 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1941년 키예프 전투에서 생포된 소련군 포로


흔히들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이 패배한 결정적 원인으로 히틀러의 오판을 지적한다. 모스크바를 향해 곧바로 전격전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구데리안 장군의 의견을 무시하고 키예프 전투를 먼저 명령했기에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동절기와 맞닥뜨리는 실기를 해서 결국 전쟁에서 패했다는 주장이다.

그럼 왜 히틀러는 모스크바 점령에 앞서 키예프를 먼저 공격하라고 명령했을까. 무작정 히틀러를 비판하기보다 그 연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소련군의 주력은 주로 키예프 등 소련 남부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곡창지대와 유전지역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게 히틀러가 키예프 전투를 우선 명령한 배경이다. 모스크바로 먼저 깊숙이 쳐들어가면 주력인 소련 남부군에 의해 후방을 포위당할 우려가 있었고, 연료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전쟁을 지속할 석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룸멜이나 구데리안 같은 전격전 주창자들은 공격에만 몰두하고 연료와 식량 등 보급 문제는 소관이 아니라며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작전을 총괄하는 히틀러와 마찰이 잦았다.

1941년 8월부터 9월까지 치러진 키예프 전투에서 독일군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포위작전으로 무려 70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을 섬멸했다. 소련은 키예프를 지키기 위해 80만 대군으로 맞섰으나 이중 70만 명이 섬멸당하고 만 것이다. 소련이 키예프를 사수하기 위해 국운을 걸고 결사 항전을 벌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키예프가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이다.

이게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유이자 배경이다. 코미디언 출신의 유대인 젤렌스키가 나토 가입을 강행하자 푸틴이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키이우와 가까운 수도 모스크바 보호를 위한 ‘영토’ 사수 때문이다. 젤렌스키는 유대인 특유의 아집으로 더이상 자국민들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는 독일군에 맞서 싸웠던 슬라브족이 같은 슬라브족에게 죽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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